20240405_영화인문학_<카프카, 유대인, 몸> 메모_김새은

p.214 ”카프카에게 몸은 위기를 드러내는 매체이자 새로운 시작을 실험하는 공간이 된다. 이 달라진 몸은 거꾸로 자신에게 정체성의 문제를 인식시키고 자성을 촉구한다. …, 카프카는 ‘동물 몸’을 통해 몸을 탈영토화하는데 한편으로는 이러한 주류 사회의 배타적 표상이 체현되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고립을 통해 자기반성과 자기 찾기가 가능해짐으로써 인물들의 무의식적 소망이 실현될 계기를 만들어 준다. …, 카프카에게 몸이란 동물의 수준까지 내려간 인간 본래의 모습이자, 사회성을 자의적, 타의적으로 포기한 정체성이 표현되는 장소이고 거꾸로 사회적으로 경멸당하는 표상이 투사되는 장소이다.”

카프카 <변신> 으로 보는 ‘근대성’ 특징

“ <변신>의 변신한 그레고르를 벌레로 보면 안된다. 당시 카프카가 경계했던 점이기 때문에 삽화로 벌레가 들어가면 안된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변신>의 변신한 해충은 볼 수 없는 상상적 동물을 말한다. 우리에게 불쾌하지만 친숙한 대상이다. 그리고 <변신>의 변신이란 주인공 잠자의 억압된 소망이다. 재밌게도 해충으로 변한 그레고르는 자신의 변한 모습보다 출근할수없다는 사실에 먼저 당황해한다.”

카프카가 몸의 변신을 통해서 말하고자 한 건 자기 찾기인 것 같다. <변신>의 그레고르가 해충이 된 것은 억압된 소망에 의한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카프카 자신이 억압된 소망 속에서 자기 찾기를 시도하던 사람이기에 이러한 글들을 써내려간 게 아닐까 싶다. 굳이 비교해보자면 동양의 사주명리의 자기 찾기란, 가지고 태어난 기운과 계속해서 새롭게 결합되는 기운의 시너지를 보면서 지금의 자신을 계속해서 발굴하고 개입해나간다. 카프카가 사주명리를 알았다면 <변신… 그리고 이 후>와 같은 후속편이 나오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카프카의 자기 찾기는 그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억압된 소망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좋은 도구일뿐이다. 억압된 소망이 목표가 되면, 사람은 그 억압을 이겨내지 못하는 다수의 시간동안 허무감에 빠져 헤어나오기 쉽지 않게 된다.

난 <변신> 의 내용을 해충으로 변신한 자신을 이겨내느냐 못하냐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즉 그가 원한 변신이 아니라고만 생각하며 책을 읽었지만, 하지만 이 책을 보니 억압된 소망을 가진이는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몸이 변신하는 건 필연적인 것이다.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단지 필연적이라고 생각해야 (카프카 <심판> 중)” 한다는 카프카가 죽은 후에 나온 후속작의 내용도 이해가 된다. <심판>은 개인이 사회와 권력 체계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카프카는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고 그저 필연적이였던 아슈케나짐 (서양적 유대인)으로서의 삶에서 받은 억압을 이겨내고자 하는 몸부림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카프카 자신의 책 또한 그에게는 몸이 아니었을까 싶다.

태어나서부터 한국인인 나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이다. 내가 한국인일수 있다는 사실에 독립운동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조선족을 혐오하고 있는 나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이 망할거라는 전망과 북한의 침공이 예상되는 것들이 최근 정말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아서 큰 불안감을 가지고 지내고 있다보니 더욱 내가 혐오하는 민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누구든 언젠가 그들처럼 이방인이 되기 십상이니 말이다. 언제가 갑자기 카프카처럼 책을 써내려 가려할지도 모르는 일이다.